도산 안창호
출생과 성장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열여섯 살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
독립협회와 공립협회 활동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고,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신민회 활동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산은 동지들과 진지한 상의 끝에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
도산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도 설립되었다. 1912년 11월에는 도산의 주관으로 4개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도산을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도산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 속에 결집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 활동
1918년은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 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자 도산은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도산은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재촉하였다
대독립당 운동과 한국독립당 활동 그리고 순국
[한국독립당 추진때의 도산] 1926년 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이제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업적 및 교훈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1895년 상경, 구세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