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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노동을 권장했나요? 승려들이 노동을 했다고 해서 노동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를 알고 싶어요.'삶에서

승려들이 노동을 했다고 해서 노동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를 알고 싶어요.'삶에서 어떤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교훈을 나는 일찍이 태국 북동부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초기 시절에 배웠다.당시 아잔 차 스승은 절에 새 법당을 짓고 있었다. 우리 수행자들 대부분이 그 공사에 달려들어 있었다. 아잔 차 스승은 수행자는 단지 한두 병의 콜라를 마시기 위해서도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어찌 됐든 그것은 절 측으로선 마을의 인부들을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가끔 나는 신참 수행자들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새 법당은 수행자들이 쌓아올린 둔덕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둔덕을 쌓고 남은 흙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아잔 차 스승은 우리 수행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그 남은 흙을 전부 법당 뒤로 옮겨 놓으라고.그 다음 꼬박 사흘 동안 우리는 오전 10시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삽과 외바퀴손수레를 동원해 그 거대한 양의 흙을 정확히 아잔 차 스승이 지목한 장소에다 옮겨 놓았다. 일이 끝나자 나는 무척 기뻤다.다음 날 아잔 차 스승은 며칠간 다른 절을 방문하기 위해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부주지가 우리 수행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흙이 잘못된 장소에 옮겨졌기 때문에 다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어이가 없었지만 불평에 찬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는 열대 지방의 무더위 속에서 또다시 사흘 동안을 힘겹게 흙을 옮겼다.두 번째로 흙더미 옮기는 작업을 막 끝났을 때 출타했던 아잔 차 스승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 수행자들을 불러놓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말했다.“왜 흙을 이곳에다 옮겨 놓았는가? 내가 흙을 저 장소에다 옮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빨리 저 곳으로 옮기도록 하라.”나는 화가 났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이.‘고참 승려들끼리 먼저 잘 의논해서 결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불교는 이런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체계화된 종교여야 한다. 그런데 이 절은 전혀 체계가 잡혀 있질 않아서 흙더미 하나를 어디로 옮길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또다시 3일 동안 우리는 말 그대로 허리가 휘도록 일해야만 했다. 무거운 흙더미를 채운 외바퀴 수레를 밀면서 나는 태국 수행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영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언제가 되어야 이런 비합리적인 일들이 사라질 것인가?나는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화를 내면 낼수록 외바퀴 수레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을.그때 동료 수행자 중 한 명이 내가 투덜거리는 것을 보고 내 쪽으로 걸어와서 말했다.“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너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그의 말이 옳았다. 불평과 투덜거림을 멈추자 외바퀴 수레를 밀기가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큰 교훈을 배웠다. 흙 옮기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고,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아잔 차 스승과 부주지가 처음부터 짜고서 우리에게 몇 차례나 흙더미를 옮기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265-7) 

절에서 스님들에게 필요한 것을 할 때는 당연히 스님들이 일을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초기에 절이 아직 없을 때는 주로 숲의 나무 밑에서 생활했는데, 그때는 딱히 할일 없었고, 주로 스님들의 옷을 짓는 일을 공동 작업으로 했습니다. 부처님도 역시 동참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외진 곳에 수행하는 절이 생기고, 외진 곳이다보니 탁발을 할 수가 없어서, 자급자족했습니다. 이때는 절을 관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농사일까지 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백장 선사가 한 말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울력이라고 해서 절에서 일을 합니다. 청소나 절에 딸린 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것, 절에서 맡은 소임을 하는 것 등등이 있습니다.

간혹 수행의 한 방편으로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절 이야기가 아니고 천도교 이야기입니다. 해월신사 밑에 손병희가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해월신사가 손병희에게 마당에 솥을 걸어라고 하였습니다. 손병희는 정성을 들여 돌과 진흙으로 솥을 걸 솥집을 쌓아올리고 거기에도 솥을 걸었습니다. 누가 봐도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해월은 "이렇게 정성이 없어서야..."라고 하면서 발로 차서 무너뜨려버리고는 다시 쌓으라고 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기 진흙을 만지니 손이 정말 시렸지만, 손병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다시 솥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아홉번을 하고 나서 해월은 "이제는 좀 쓸만 하구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손병희를 나중에 자기 후계자로 삼았으며, 그렇게 해서 손병희는 천도교 3대 교조가 되었습니다. 그 손병희가 바로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인 손병희 선생입니다.